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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靜)과 동(動)의 관점에서 바라본 선무도

작성자
sunmudoland
작성일
2014-02-06 12:48
조회
1855
1. 서 문

선무도는 깨달음을 위한 실천적(實踐的) 방편으로서, 좌관, 명상을 바탕으로 선요가, 선무술, 선기공 등 다양한 방법을 그 종류로 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각각의 방법들이 좌관과 명상은 정(靜)적인 방법으로, 선요가, 선무술, 선기공 등 그것 이외의 것들은 동(動)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靜과 動은 서로 각기 다른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靜 속에서 動을 찾을 수 있고 , 動 그 속에서도 靜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가능할 때 진정한 수련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본 문

動속에서 靜을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영상을 빗대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갖가지 영상물의 기본은 시각의 잔상(殘像)효과를 기본 원리로 하여 초당 수십 개의 프레임(frame)을 보여주어 움직임을 표현한다. 하지만, 1/24초라는 인간의 인식 한계를 이용한 움직임일 뿐, 실상은 정지(靜止)된 단일 영상들이 불연속적(不連續的)으로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사물들은 어떨까? 현실의 시각정보들은 그와 반대로 분절(分節)된 것이 없으며, 연속성이 있는 것들이고, 영상물은 단지 그순간만을 잡아내었다가 우리 눈의 둔감함을 이용해 흉내를 낼 뿐이다.
여기서, 수행속에서의 움직임을 생각한다면, 이때의 찰나는 인간의1/24초라는 인식의 한계 속에서의 정지라 하겠다. 시각은 찰나에 비하면 1/24초라는 상당히 긴, 다시 말하면 둔감한 감각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각 외의 다른 신체의 모든 감각들,(시각처럼 시간의 개념은 아니지만) 즉 후각, 촉각, 미각, 청각 등도 여타의 동물에 비하면 극히 둔감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여, 더 찰나로 다가서며, 시시각각 변하는 '나'라는 존재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체의 모든 감각을 닫고, 단지 마음으로써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시각을 닫으면, 모든 감각기관을 외부로부터 닫을 수 있다면 動속에서 靜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이 더욱 쉬워질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둔감한 감각의 인식 한계를 극복하여, '마음'이라는 감각 아닌 감각으로 참 '나'라는 존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靜속에서의 動은 어떨까? 이것은 시각적 인식 한계 내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실제 현실은 연속된 것들이지만 , 둔감한 시각으로 1/24초 내에서는 사물은 곧 정지 상태로 보이게 된다. 수행중 이 정지 속에서 수행에 영향을 미치는 움직임은 무엇이 있을까? 움직임이란 것은 꼭 실체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관념의 영역포함 된다고도 생각하면, 여기서 이것을 정신작용, 즉 좋게 말하면 좋은 생각, 나쁘게 말하면 잡념이라 하겠다(명상의 영역에서 그 방법론등에 관한 것은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호오(好惡)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머릿속이라는 곳에서는 온갖 생각의 조각들이 변화무쌍하게 일어났다 꺼지곤 한다, 이렇듯 인간의 둔한 외재적 감각으로는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는 세계에서도 정신의 움직임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외견상의 靜을 꿰뚫어, 내재된 정신의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저 높은 경지의 수행에서의 '무아',즉 나까지도 없는 경지는 이러한 계속 변화하는 정신적 움직임까지도 靜으로 볼 수 있는 찰나까지 도달한 상태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런 논의들을 선무도의 정중동(靜中動), 동중정(靜中動)에 연관 지어 생각한다면, 우선 대체적으로 정적이라 여겨지는 좌관, 참선 속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단, 다른 모든 외재적 감각을 차단하려고 노력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정신작용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선요가, 선체조, 선무술의 각 동작 속에서도 내 몸 외관상의 모든 감각을 배제해야 점점 더 찰나로 다가갈 수 있고, 그 짧아지는 찰나속에서도 참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기가 쉬울 것이다. 또한 그렇게 고차원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육체적 활동이 수반되는 이런 수행에서 순간의 느낌중에 '좋다'라는 것을 찾고, 그것을 기억하고, 반복하려고 노력한다면 더 나은, 올바른 수련이 되지 않을까 한다.

3. 결 론

검은 색의 반대는 흰 색이 아니라, 검지 않은 색이다. 좋은 것의 반대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예로서 벌써 이 관념들은 두 개에서 세 개로 관념이 다양화되었으니, 이분법적 사고는 어려운 것을 쉽게만 생각하려는 자기 편의주의, 자기 합리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선무도 수행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참 나를 알아가는 그 과정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라는 것을 깨우치려면, 靜과 動, 이분법적인 사고로 그 변화를 정의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즉, 사물을 둘로만 구분 짓지 않는 열린 감각으로, 변화무쌍한 스스로의 마음을 쫓아가면서, 선무도를 눈과 귀로 배우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행하면 더욱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2007년 2월 제 31회 선무도 승단 심사 1단 응시자 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