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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 춤사위 뼈대는 선무도

작성자
sunmudoland
작성일
2014-02-17 05:48
조회
1773
-선무도 10년 현대무용 박일규교수-

#선무도에서 얻은 무용가·배우로서의 생명력

“1988년 아메리칸댄스페스티벌에 ‘제3세계 안무자’로 초청받았습니다. 같이 초청받았던 인도네시아 안무자는 밀림 원주민의 삶을 표현했는데 저는 뉴욕대 유학시절 배운 현대무용을 공연했죠. 당시 ‘뉴욕타임스’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이 없는 무국적(無國籍) 공연’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충격받았죠.”

한국에 남자현대무용의 물꼬를 트고 현대무용와 한국무용의 과감한 접목을 시도한 개척자로 평가받는 박일규 교수(51·서울예술대 무용과). 그가 선무도를 배우게 된 계기는 무참히 구겨졌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서양춤만 흉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김수자 선생의 도살풀이춤을 배우는 등 ‘한국적인 것’ 찾기를 시작했다.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한국무용의 특징이 제 성격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작한게 해동검도, 택견 등의 전통무술이었죠. 이것들은 한국적 동작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은 무술이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움직임에 적용하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서울 신사동에 선무도 강남지원이 문을 열었고 마음에 담고 있었던 선무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딱 10년전 일입니다.”

느릿느릿 움직이지만 결코 끊어짐 없이 유연하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전신의 기(氣)를 모아 발산하는 듯한 집중력이 느껴진다. 잠깐의 시범에도 박교수는 온 몸의 기를 다 써버린 표정이었다. 그는 선무도를 “선요가를 중심으로 호흡하고 거기서 단련된 기로 무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무도의 핵심은 호흡과 명상. 호흡하면서 춤추고 연기해야 하는 그에게 움직임이 호흡과 일치하는 선무도는 한국적 움직임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줬다.

그는 선무도의 움직임을 활용해 뮤지컬 ‘태풍’을 안무했고 이것으로 뮤지컬대상 안무상을 받기도 했다. 무용가뿐 아니라 연기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걸 직접 체험한 그는 그가 강의하는 서울예술대에 연기 기초과목으로 선무도를 소개했다.

“목을 많이 쓰면 기관지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낍니다. 선무도 호흡이 그래서 도움이 되죠.”

그는 지금도 집, 학교 연습실 등에서 매일 선무도를 한다.


#선무도에 묻은 집착과 방황은 이제 버리고

선무도는 그에게 더 나은 공연을 할 수 있는 뼈대를 남겼지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했던 변화는 적지 않았다. 한국적인 움직임을 찾기 위해 선무도를 배웠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선무도 배우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것을 찾겠다는 집착을 버리게 됐다.

“한국적 정체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은 후 해동검도, 택견, 참선 등 우리문화를 찾아 다녔습니다. 서양의 것은 의도적으로 멀리했죠. 한 손에 대금을 들고 허리에 검을 차고 일부러 산 속에서 며칠씩 있다가 나오곤 했습니다. 이것저것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더라구요. 자꾸 시들해지고.”

전통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여 접근한 것들에서
‘이게 정말 우리의 움직임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고 자료를 찾아보면 회의가 더욱 커졌다. 고민과 방황을 거듭하는 와중에 윤이상 선생의 음악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고,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을 결합시키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했다.

“문제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1988년부터 15년동안 이렇게 지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가장 내것인 것처럼 느껴지는 게 떠올랐습니다. 뮤지컬이었죠. 나의 본성과 가장 잘 맞는 건 뮤지컬이라는 느낌이 확 왔습니다. 40대까지는 삶의 방식과 작품을 의도적으로 혹은 억지로 끌고 왔던 것이죠. 한국적인 것에 대한 끌림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각론에 불과했어요. 50세가 된 지금은 ‘내 정서가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가자, 이제 솔직해지자’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전형적인 서양 뮤지컬 형식이 저에게 제일 잘 맞는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을 돌아, 나이 쉰이 돼서야 얻은 결론이기에 ‘조금 더 일찍 나 자신을 찾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고 그는 고백했다.

“뒤늦게 발레를 시작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정상은 눈 앞에 있는데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려 조급함이 생겼고 그래서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던 것 같습니다. 유학시절 전자음악, 이런저런 무술 등을 했죠. 방황하지 않고 연기자의 길을 쭉 갔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 깊이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게 됐어요.”

선무도가 그에게 남겨준 또 하나의 짐은 무릎 부상이다. 2000년 서울예술단원들과 함께 선무도 수련을 하기 위해 경주 골굴사로 갔다가 산에서 실족해 무릎이 탈골됐다. 이후 수련·수업 중 발목이 꺾이기를 몇차례. 공연중에 혹은 일생생활 속에서 충격을 받게되면 통증이 심해진다. 지난해 뮤지컬 ‘폴몬티’ 공연 때는 중간에 무릎이 아파 절뚝거리며 연기했다.

“3년동안 많이 아프면서 몸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고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제 작품의 중요 모티브이자 내 삶을 좌지우지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었습니다. 사랑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몰입했고 그것 때문에 엄청난 굴곡을 겪었습니다. 신체적 고통을 겪으면서는 조금 더 이성적이고 절제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박교수의 예술적 방황은 한국 무용계에 소중한 자산을 안겨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고통은 그가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사회적 평가와 자신이 느끼는 실체와의 괴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술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박일규 교수

-1974년 서울연극학교졸업

-1978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수료

-1980년 국립발레단 단원

-1984년 미국 뉴욕대 현대무용학과 졸업

-1986년 미국 뉴욕대 대학원 현대무용 석사

-현재 서울예술대학 무용과 조교수

〈글 임영주·사진 박재찬기자 minerva@kyunghyang.com〉


경향신문'04_02_26 [속보, 생활/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