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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반 선무도

작성자
sunmudoland
작성일
2015-05-07 12:27
조회
2124
20여 년 전,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수많은 지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이란 화두는 들고양이 마냥 밤 산을 헤메게 하였고, 새벽녘 떠오르는 해를 보며 그렇게 1년여를 울었었다.
늦은 가을 설악의 정상, 하얀 눈발 속에서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나의 화두는 부서져 내렸고, 어떠한 유혹도, 가족의 반대도, 세상의 명리도 뒤로 한 채 지리산에서의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茶와 함께 시작한 지리산에서의 10여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라는 진리 앞에 나의 도반이 되어 주었던 茶에 대하여 넘어설 수 없는 한계와 매너리즘은 새로운 도피처를 찾게 하였고, 우연한 기회에 위빠사나 수행법 중의 하나라는 선무도를 만나게 되었다.
두어 달을 탐색기간으로 정하고 골굴사에서 장기 수련자로 수련하면서, 위빠사나 수행법 중 하나라 생각했던 선무도는 점점 여타의 양생법이나 무도수련과 다르지 않구나 라는 실망을 하게 되었고 삼개월여의 선무도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을 맺게 되었다.

見指忘月(달을 가르키니 손가락만 보고 있다)

지리산으로 돌아온 내게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된 이집트 여행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고 평소 마음에 두고 있었던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북방과 남방, 그리고 티벳불교 등의 수행법들을 접하고 그와 관련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불교 수행이라 함은 간화선과 염불, 간경정도로 생각했던 나에게 다양한 수행법들은 불교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막연하기만 했던 불교를 이해할 수 있었고, 불자로써 가야할 길 또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불교의 시작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요, 그 길을 석존이 제시 하였다. 수많은 수행법은 시대의 산물이자 방편일 뿐 불교의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이 없는 삶을 살 때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석존 가르침의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선무도를 처음으로 알게 된 지 7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난 해,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던 나는 선무도를 다시 만났다. 수많은 수행법이 결국 하나로 돌아감을 모르진 않지만 나의 근기와 업습에 맞고,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는 불교 수행법을 찾던 나에게 선무도 만큼 적합한 수행도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무술이라는 분야, 그리고 가장 힘들고 어렵게만 느꼈던 유연성에 대하여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어렵고 힘들게 느끼는 분야를 도전해 봄으로써 나의 진면목을 여실히 알 수 있고, 하고자하고 또한 하고 있었던 위빠사나 수행을 일상의 삶속에서 그대로 접목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에게 선무도는 수련시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다 객관화시켜 알아차림하고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선무도를 다시 시작한 지도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50여 년 동안 굳어 있던 몸과 마음이 하루아침에 소통될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굳어 있는 몸과 마음에 조급함과 화가 치밀기도 하고, 때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예전과 달라진 면이 있다면 이제는 화가 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성품을 이해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선무도 수행의 주된 방법은 사띠(알아차림, 마음챙김)이다. 불교수행법의 큰 틀인 사마타와 위빠사나중 사마타의 도구가 집중이라면, 위빠사나는 사띠이다. 사띠없는 위빠사나는 사공 없이 목적지를 향하는 빈 배와 같을 것이다. 만약 선무도 수행에서 사띠가 없다면 세속의 여타의 양생법이나 무술수련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선무도의 본래 명칭인 불교금강영관에서 천명하고 있듯이 선무도는 관법수행이고, 관이라 함은 곧 팔리어의 사띠이니 선무도의 주된 수행법은 집중하고 집착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그대로를 단지 알아차림 하여야 할 것이다. 알아차림 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바로 보고 어떠한 대상에도 집착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수행함에 있어 매순간의 동작과 일어나는 생각 그리고 호흡 등을 긴장함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제법이 無常, 苦, 無我임을 바로 알아 지혜를 얻어 불교의 목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즉신성불을 이루는 것이 선무도의 근본목적이 아닐까 한다.
나의 선무도 수행은 전기한 바와 같이 사띠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좌관과 입관, 행관 등을 수련함에 있어 호흡을 따라 흐르는 정과 동의 상태를 매순간 알아차림하고 있다. 아직은 좌관과 입관 등, 비교적 정적인 수련에서는 사띠의 힘이 있지만 빠른 행관동작에서는 사띠를 놓치고 그저 동작의 순서에 연연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과정임을 알기에 사띠를 놓치고 있는 자신을 또한 사띠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지리산에서 서울 강남지원을 오가며 강남지원 채희걸 법사에게 수련지도를 받고 있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오가며 지도를 받는 것은 새로운 꿈과 비전을 스스로에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서 다시 선무도를 만났고 그 선무도를 통하여 즉신성불 할 수 있는 길을 확신하고 있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내게 큰 벽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동작조차도 제대로 나오고 있지 않고 선무도가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지만 단순한 무술이 아닌 관법수행으로서의 선무도를 좀 더 체계화 하고 발전시켜 나만의 선무도를 만들고, 내가 경험했던 삶과, 선무도를 통해 얻은 지혜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
그것이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 삶의 천명임을 알고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도반 선무도와 함께 나의 길을 가고 있다.